1995년부터 광주에서 살고 있는 정야나 조선대 교수가 지난 3월24일 아버지 정추 선생 탄생 100돌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장을 찾았다. 정대하 기자
벽에 걸린 비디오 영상에 피아노를 치는 한 노인이 등장했다. 피아노 위엔 악보들이 놓여 있었다. 흑백 사진의 주인공은 광주 출신 디아스포라(이주민) 음악가 정추(1923~2013) 선생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은 정추 선생 탄생 100돌을 기념해 오는 5월28일까지 아시아문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나의 음악, 나의 조국’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혜규 학예연구사는 “광주~평양~모스크바~알마티로 이주한 음악인류학자 정추 선생의 기록과 작품으로 한 음악의 삶과 음악 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전시장에서 둘째딸 정야나(59) 조선대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났다. 정 교수는 “아버지의 삶과 음악 세계를 기억하는 특별전이 고향에서 열려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남은 ‘월북’-북은 ‘김일성 우상화 반대’
광주~평양~모스크바~알마티 ‘유랑’
1959년 카자흐스탄 정착…자매 중 둘째
“한국인 알고 싶어 1995년 광주 유학”
음악인류학자 정추 탄생 100돌 전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월28일까지
정야나 조선대 교수가 지난 3월24일 아버지 정추 선생 특별전 전시장에 소개된 ‘가계도’를 설명하고 있다. 정대하 기자
정야나 교수가 지난 3월24일 아버지 정추 선생 탄생 100돌 기념 특별전 전시장에서 가족들의 사진 앞에 섰다. 정대하 기자
정추 선생은 카자흐스탄에선 존경받는 작곡가이자, 고려인 가요를 채록해 한민족의 음악을 지키려고 했던 민족음악연구 선구자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잊힌 음악가”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14년 정추 선생의 유족이 기증한 기록물과 옛 신문·잡지 등 각종 자료를 3부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특히 1부에서는 정추의 가족을 중심으로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한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정 교수는 가족들이 함께 찍은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을 짚어가며 “아버지와 어머니, 나, 그리고 언니예요”라고 말했다. 정추 선생은 1959년 카자흐스탄 국립여성사범대 음악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뒤, 신임 교원으로 온 나탈리아 클리모치키나(1936~2017)를 처음 만났다. 선생의 부인은 교육학과 도서관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였다. 정 교수는 “교원 모임을 마치고 나와 우연히 다시 만나 길을 물으며 대화를 하면서 두 분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구한말 광주 지역의 부호이자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정낙교(1863~1938)의 외손자였던 정추 선생은 베를린에서 음악 유학을 했던 외삼촌(정석호)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광주고보에 진학한 선생은 일본인 배속장교 배척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뒤 서울 양정고보로 옮겼다. 1942년 니혼대 음악학과 작곡부에 입학했던 그는 1944년 일본군에 강제징집됐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주 출신 디아스포라 음악가 정추(1923~2013) 선생.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정추(오른쪽) 선생과 카자흐스탄 출신 부인 나탈리아 클리모치키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카자흐스탄 시절의 정추 선생과 둘째딸 정야나 교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전시 2부는 월북과 러시아 유학 시기를 조명한다. 귀국한 정추 선생은 1946년 12월 평양 국립영화촬영소 음악감독으로 일했다. 영화감독이던 형 정준채가 먼저 월북한 뒤 그를 부른 것이었다. 국비 장학생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해 작곡 이론을 공부하던 정추 선생은 1957년 11월 김일성 우상화를 반대하는 북한 유학생들과 뜻을 함께하고 소비에트 연방으로 망명했다. 그뒤 17년간 무국적자로 살았던 선생은 1975년 소련 시민권을 취득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국적을 얻었다. 한국적인 선율을 연구한 작품 ‘조선적 주제에 의한 교향곡’을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발표한 선생은 작품 악보를 출판하면서 카자흐스탄 작곡가 동맹에서도 입지를 다졌다. 이 섹션에선 선생의 작곡 습작 노트와 출판된 악보 등을 볼 수 있다.
전시 3부는 카자흐스탄에서 음악인류학자로 활동했던 시기이다. 정추 선생은 1937년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불렀던 가요 1068곡의 가사와 500여곡의 악보를 채보하는 등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소비에트 한인의 가요문화’(1979)로 레닌그라드 음악영화대학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정 교수는 “카자흐스탄으로 온 아버지와 ‘망명객 친구들’은 <고려일보>나 한국어 라디오·극장 등 디아스포라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정추 선생은 1989년 2월 싱가포르에서 한국에 살던 누나·동생·조카들과 재회했고, 2012년 한국을 방문해 고향에 묻히고 싶다고 했으나 이듬해 알마티에서 별세했다. 선생의 동생 정근 역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둥글게 둥글게’ 등의 동요를 작곡한 음악가이다. 이 때 가족 상봉은 고종사촌이자 극작가 김우진의 아들인 고 김방한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의 노력 덕분이었다.
정야나(오른쪽 앉은이 빨간옷) 교수는 부친 정추(정 교수 오른쪽)와 함께 2004년 3월4일 청와대에서 열린 ‘ 해외동포상 수상자 초청 다과회’에 참석했다. 노무현사료관
정 교수는 아버지의 삶의 행로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카자흐스탄에서 나고 자라 알마티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그는 카자흐스탄 한국라디오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1995년 광주에 정착했다. 그는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했고, 저는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남대 대학원에서 2004년 영미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16년 조선대 러시아어과 교수로 임용됐다.
정 교수는 “아버지는 제가 한국어와 한국의 삶, 친척들을 알기를 기대하셨는데, 이제 모든 것이 이뤄져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